[정상진의 성공프로젝트]포기하지 않는 것

펌질 2005. 7. 25. 10:59
[정상진의 성공프로젝트]포기하지 않는 것

윈스턴 처칠은 말년에 고향 근처에 있는 대학으로 부터 강연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곧 영국 전체에 화제가 되었고, 이 위대하고 유명한 영국인의
실제 모습을 보기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가 역사에 남을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자신의 오랜 삶을 통해 축적된 지혜를 전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대학 대강당에 빽빽히 들어 찼고,
모두 이 위대한 인물의 힘있는연설을 숨죽여 기다렸다.
마침내 처칠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절대로,절대로,절대로,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그는 돌아가 앉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서서히 사람들은 처칠의 연설이 정말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에게 이 이상 중요한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인생 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을 짧게 하고 싶었다면, 그냥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해도 됐을 텐데, 왜 '절대로'를 네 번이나 반복했을까?

그것은 처칠이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한계를 그으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포기할 이유를 찾기는 쉽다.
자신에게 한계를 그어 놓으면 언젠가는 그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설정하면 우리를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없다.

당신이 무언가에 한계를 부여하면,
그 한계도 언젠가는 당신을 제한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한계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말고,
그 에너지를 다른 유용한 곳에 쓰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보도 섀퍼의 '돈' 중에서-


우리가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며
내 삶의 뒷켠으로 밀어놓은 일들이 있는지,
그 일들을 뒤로 밀어두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유란 것이 거의 대부분은 내가 마음대로 정해버린
'한계'라는 것 때문일 테니까...
한계, 불가능, 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나는 100m 를 10초 안에 달리지 못한다. 절대 달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 라는 틀을 벗어나 인간 이라는 범위로만 넓혀지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나는 성공할 수 없다. 배운것도 없고, 가진것도 없다. 그래서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또한 '나'라는 틀속에 갖혀있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세상에 그 무수히 많고 많은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처음부터 부유했던 사람이
과연 몇 퍼센트나되고,
그들중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과연 몇퍼센트나 될것 같은가?
나는 벌써 서른인데, 나는 벌써 마흔인데, 나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

하지만, 나이 또한 '나'라는 틀속에서 제멋대로 한계지어진 단순한 의견일 뿐이다.
평균연령이 늘어나고 있다. 이미 백세를 향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당신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서른이라면, 앞으로 당신의 인생은 70년이 남는 것이다.

당신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마흔이라면, 앞으로 당신의 인생은 60년이 남는 것이다.
(줄기세포의 발견으로 백살 이라는 수치는 또한 급 상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반도 채우지 못한 우리네 인생을 늦었다. 힘들다.
불가능 하다는 제 스스로의 틀속에 묶어 두고 남은 평생을 후회만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정말 그러길 원하는가?


한계는 스스로 정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과소평가일 뿐이다.
그 과소평가가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의 미래를 창초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다.
자신을 믿어라. 자신의 미래를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위대하다. 당신은 이미 위대하다.
그리고 더욱 더 위대해 지기 위해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것이다.
포기는 배추를 셀때나 쓰는 단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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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 한일 - 손석희 [펌]

펌질 2005. 1. 13. 21:04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손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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